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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영신수련: 자유를 얻기 위한 영적 체조 교본.

1. 어떤 책인가?


  영신수련은 분량으로 하면 소책자 100쪽이 미처 안되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완성되는 데에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냐시오는 이 책을 만레사에서 쓰기 시작하여 알깔라, 살라망까, 빠리에서도 계속 적어 넣고 고쳤으며 로마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 부분을 체험하고 실행하면서 적은 것은 역시 만레사라고 해야 한다.

2.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1)


  이 책은 이론적이거나 철학적, 신학적인 성찰의 결과가 아니며 또한 뛰어난 재능이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오직 이냐시오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오랫동안 혼자서 관찰하고 판단하면서 지내온 삶의 열매이다.
  그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단 한 글자도 보태지 않았다. 그의 관찰에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의식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면서 스스로 묻곤 하였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부딪히고 겪는 이 사실을 일깨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 자신의 인생사를 읽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이 이것을 알게 된다면 생활이 많이 바뀔텐데!"


3. 영적 체조의 교본.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엮어진 것이다. 따라서 심심풀이 서적이나 인생에 관한 연구서나 수필집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사람의 내면 세계의 여행기나 기도서나 축성기도문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정신 체조를 담당하는 코치를 위한 교본이며 정신의 재활을 위한 물리치료 교본이다.
  그는 뜻밖에 얻은 내적 자유에 감동되어 어떻게 그 자유를 얻게 되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상 생활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와 성인전을 읽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그분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모험을 감행하여 죄의 노예로 지내던 자신의 처지에까지 내려오신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4. 그분과의 만남을 위한 수단.


  그는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찬찬히 한 단계씩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하나의 "방식과 순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따르면 누구나 자유를 회복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즉 우리 모든 인간들의 처지인 내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회복기의 정신 체조 교본을 고안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수련들을 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효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적 체조의 효과는 각자가 가져야 할 진지한 마음 자세와 영신수련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수련을 하는 사람은 진정 유일하게 효과를 주시는 분 곧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막힘없이 자유롭게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2)
  영신수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신수련은 인간을 뿌리깊은 고독에서 해방시켜주는 그분과의 만남을 위한 수단이다. 인간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고독은 정신 세계의 블랙 홀처럼 인간 존재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며 인생 자체를 허무로 돌리게끔 충동질한다. 세상을 오직 홀로 살아가는 것만큼 비인간적인 일이 또 있겠는가!

  이냐시오의 삶이 바로 그랬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영신수련이 의도하는 것은 하느님과 영신수련을 하는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통교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3)

5. "이 생애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것"4)


  영신수련이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영신수련은 하느님 편에서 이미 시작하신 이 만남으로 당신을 이끌며,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역정을 돌아보게 하고 인간 역사의 무대에 놓여있는 자신을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지루한 독백으로부터 끌어내어 무진장한 대화적 실존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당신의 고유한 인생 여정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계신다. 자신의 인생 역사를 해독하려면 모든 인간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를 얻어야 한다. 이 열쇠는 바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앙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역사를 해독하면서 그분을 만나게 하는 신적인 안목이며, 그분과 함께 우리 인생을 재건토록 하는 거룩한 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필연코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냐시오가 겪은 일들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자기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이것을 단지 개인적인 비밀로 간직하지 않고 이 체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체험을 글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거듭거듭 성찰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체험을 귀담아 들으면서 이 모든 것들을 실제적인 수련의 형태로 갈고 다듬었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일생일대의 일로 삼게 되었다.

[표 1] 영신수련의 작성

만레사 (1522-1523)
24-44: 양심성찰, 45-71: 제 1주간, 91-100: 왕의 부르심, 101-126: 강생과 유년시절, 135-148: 두 개의 깃발, 169-189: 선택, 190-209: 제 3주간, 218-229: 제 4주간, 238-260: 기도 방법들, 313-328: 제 1주간의 영신 식별 규칙.
빠리 (1528-1535)
일러두기 3,5,11,12,13,16,20, 22: 전제, 23: 원리와 기초 초안, 73-81(76은 제외): 부칙들, 149-157: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 164-168: 세가지 방식의 겸손, 230-237: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316-318: 제 1주간의 영신 식별 규칙, 352-365: 교회 감각 1부.
이탈리아 (1536-1539)
일러두기 1,2,4,6-10,14,15,17-19,21, 23: 원리와 기초 확정, 261-312: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들, 210-217: 식사 규칙, 314-315: 제 1주간의 영신 식별 규칙.
로마 (1539-1541)
최종 교정 및 보완 (라틴어본 작성 지시), 328-336: 제 2주간 영신 식별 규칙, 337-344: 자선금 규칙, 345-351: 세심증 규칙, 366-370: 교회 감각 2부.


제 2부. 영신수련의 이해를 돕기 위한 네 가지 열쇠.


1. 첫째 열쇠: 개인의 역사, 하느님을 만나는 신학적 장소. (성부)


1.1 "창조된 존재": 역사적 현재.

  제목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분명하고 단순하기까지 한 이 현실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5) 사물을 보는 눈이 우리의 이기주의로 인해 왜곡되고 우리의 의지가 길을 막아도, 하느님은 너무나 가깝고 내밀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심으로써 그 만남의 길을 쉽게 만드신다. 그런데 이 만남의 길은 인격을 지닌 존재들의 만남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은 개인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영신수련에 들어감에 있어서 필요한 자료 중에서 나의 역사만큼 나에게 잘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역사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게 될 때에도 그것이 일차적인 결정적 자료가 아님을 발견하는 일이다. 내가 존재하고 사랑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먼저 존재하시고 사랑하시고 일하셔야 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즉 내 인생 역정의 첫고리가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첫고리가 될 수 없다.
  다만 이 첫고리에 다가가기 위해서 다름아닌 "각자" 우리 자신의 역사와 모든 인간들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하느님께로 회심한 후에 20년동안 이 새로운 길을 걸으며 살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길을 살고 체험하도록 도왔는데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원리와 기초"를 적었다.6)   그는 이로써 인생에 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종합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반복되는 역사적이고 생생한 한가지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원리와 기초"는 각 인간 존재의 역사적 현재를 말하고 있다. "창조된 존재": 인간은 매순간 창조되고 있다. 이것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1.2 들숨과 날숨.


  이로써 이냐시오는 모든 영신수련이 이루어질 핵심적인 틀을 확보한 셈이다.
  그 밖에서 하는 일은 고작해야 사람이 제 스스로 설계한 인간적인 단련, 극기, 고행일뿐이다. 영신수련은 영원한 기초 자료인 각자의 인생 역사를 읽고 관찰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수련이다.
  이 틀 안에 모든 것들을 자리매김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전체 과정을 호흡에 비유한다면, 각 수련은 우리에게 필요한 청정 대기인 하느님을 심호흡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것, 부어진 것을 한껏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첫단계를 얼마나 성실히 하느냐에 따라 둘째 단계인 숨을 내뿜는 일, 즉 세상을 향한 인간 활동의 효율성이 좌우된다. 이 내적 호흡을 통해서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자발적인 필연으로- 남을 위한 하느님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 첫고리, 첫째 분이신 하느님은 다른 데로 우회하시는듯 하면서도 꼭 그림자처럼 우리 인생사에 함께 하시며 인생사를 꿰뚫고 들어오신다. 그분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분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다. 이 정답고 자비로우신 그림자에 대한 체험이 낡은 인간 이니고가 이냐시오로 거듭 태어날 때 거쳤던 터잡이 수련이었다.

1.3 "내가 체험한 것은 하느님 자신이었다."7)


  이 첫 번째 열쇠 없이는 인간 역사를 해독하거나 해석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해독 작업은 논리적, 감성적, 직관적인 모든 접근법들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고 초월하여 이루어졌다. 이냐시오가 자신의 역사를 관찰하면서 깨달은 중요한 한가지는, 인간은 하나의 온전한 덩어리인데 우리가 그것을 육체와 정신, 영과 육, 자연과 초자연 등등으로 갈라 놓으면서 망가뜨린다는 것이었다.
  어어서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언어의 발견이었다.
  하느님이 우리와 직접적인 통교를 하고자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응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 언어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실의 언어, 즉 행동의 언어다.


1.4 "인간 역사는 그 가장 어두운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공현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지배하여 초래한 가장 어두운 순간까지도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공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인생 역사도 항상 인간에게 충실하신 분, 하느님의 공현이다. 그분은 단지 인간에게 역사를 이룩할 힘을 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곳, 인간의 이기주의가 이루어놓은 지옥에까지 인간들과 함께 내려가셨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이 진정한 응답을 드릴 수 있는 합당한 신학적 장소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인간을 믿고 신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단지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생한 역사 안에서 발견함으로써 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요구로써 그분께 대한 신뢰가 용솟음치는 것, 이것이 이냐시오가 제 1주간이라고 부른 수련들의 목표이다.

2. 둘째 열쇠: 이 역사의 받침돌, 주 예수 그리스도. (성자)

2.1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8)


  하느님이 인간과 나눈 모든 통교는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비움"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 역사는 그분에게서 시작할 때에 "거룩한 역사"가 된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지금도 매일 모든 일 안에서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2.2 "주님께 대한 내적 인식9)"


  이냐시오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영신수련은 본질적으로 발견의 체험이다.- 예수께 대한 "내적 인식"이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인식을 통하여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주님을 "내적으로 아는 것"이 모든 진정한 인간적 지혜의 기초이며 뿌리라는 확신이 이 발견에서 나왔다.


2.3 하느님과의 통상적인 관계, 영신수련의 신경 조직.


  이냐시오는 그분을 내적으로 알기 위해서 -신비적이고 실제적이면서 내밀한 앎.- 무엇보다 먼저 그분과 사귈 필요가 있었다. 자료를 통해 그분에 대해 이런저런 것을 아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식은 박학하게 할뿐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분에 대한 지식이 쌓여갈 뿐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다.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영신수련의 마지막까지 신경 조직을 이루어 갈 것이다.


  이 관계는 필연코 관상에로 이끌며 그의 의지는 관상하는 실제에 흠뻑 녹아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관상은 단지 그분에 관한 사실들이나 -'행동 양식'- 그분의 생각이나 그분의 기준들만이 -'사고 방식'- 아니고, 가장 자기다운 부분인 내면적인 이유와 동기들을 -'존재 양식'-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정체는 그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아니라, "왜 그리고 누구 때문에 살고 움직이는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그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2.4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를 따름.


  존재 이유와 관련되는 이런 내적인 차원에 이르게 되면 수혈이 이루어지듯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동일화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그분의 "삶의 동기와 이유"가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내 삶의 동기와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분과의 점진적인 내적 동일화가 일어나서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이 나의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고 (필립 1,21) 한 말이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갈라 2,20) 한 말은 결국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은 동일화가 영신수련 여정의 중심 목표이다.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이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그분의 관대함을 낯설게 여기지 않게 되고 그 관대함이 내가 얻고자 하는 목표로 바뀌고 마침내는 내 인생의 목표로까지 바뀌는 것이다.


2.5 두 개의 좌표축: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과 목숨을 바치는 것"


  예수의 존재 이유를 들여다봄으로써,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실현되기를 바라시는 인간의 전형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형인 예수는 두 개의 좌표축 사이에서 움직였다.
  그의 수직 좌표는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이고 (요한 8,29) 수평 좌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스스로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이다 (요한 10,17-18).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과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며 그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 이유"가 된다. 이 세상을 재건하기 위한 예수의 길은 마음의 치유, 즉 우리 각자의 "존재 이유"를 치유하여 우리 마음이 이 두 개의 좌표축 사이에서 움직이도록 하는데 있다. 이 변화를 회피한채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피상적이고 불안정하며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더 큰 파괴를 가져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2.6 전 인간 존재를 건 수련.


  오늘날 세상에서 왜소해진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거기서 그리고 그 때문에 충만한 의미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바로 이런 삶의 전망으로 이끄는 과정이 유효할 뿐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인용하여 이 전망을 설명한다.


  "내적 인식"은 전 인간 존재를 걸게 한다. 기억, 상상, 감각들, 지성과 감성, ...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알고자 하는 이 수련에서 각각 제몫을 하는 것이다. 여백이 많은 동양화와 같은 형태가 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이 우리의 관상의 일부를 이루며 생생하고 심오한 방법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과 그 사람을 꼭 들어맞게끔 한다.
  저녁 노을, 하나의 미술품, 놀라운 자연 현상, 한 인간의 죽음, 한송이 꽃의 섬세한 아름다움 등 매일의 삶에서 대하는 숱한 것들이 내면 깊이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며 "알려진다". 어떤 상념이나 말로 환원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인식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표 2]

(영신수련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끝나는 곳에서 같은 여정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일종의 나선형의 심화 과정이다. 역사적 현실 안에서 이 과정의 모든 단계들이 매일 우리에게 일어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들은 항상 전과 다르고 "우리에 앞서 가신" 주님, 죽음을 이기신 그분이 항상 새로이 주도권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갈릴래아이다. 부활하신 그분이 제자들에게 가서 기다리라고 하신 그들의 삶의 현장 ...)


3. 셋째 열쇠: 이 역사의 심장. (성령)


3.1 인간의 역사에서 열정적인 활동가가 됨.


  영신수련 강줄기의 끝에 다다르면 영신수련자는 나날의 역사라는 바다에 몸을 맡겨 투신하도록 초대된다.
  이냐시오도 역사의 흐름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인간에게 이기주의라는 내적인 힘이 있어서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안으로 닫아 걸게 하고 마음 안에 겹겹이 벽을 쌓아 결국 역사를 파괴시키게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이에 못지 않게 강한 또 다른 힘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인간 역사에서 열정적인 활동가가 되게 할 수도 있으니 그것이 사랑이다. 이 말의 남용을 일체 배제하고 원래 의미대로 이해하도록 하자. 사랑이란 신실한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 관대하고 자유롭게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이 세상의 심장인 주님의 성령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힘에 수행자를 내어맡긴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로마 5, 5).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큰 물줄기는 매일의 그리고 만사에서의 성령강림을 거쳐 나간다. 성령강림은 일상적인 인간 조건이다. 성령강림은 사랑의 순환이다.


원리와 기초

3.2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우주의 심장인 성령은 쉴새없이 각 세포에 피를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피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교회에서 의식 무의식 중에 자행되는 수많은 형태의 이기주의로 인해 막혀서 잘 통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심지어 우리 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질병은 순환계의 이상에 있다.


  인류는 하느님의 구체적 사랑의 표시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재화의 공정 분배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선동하는 여러 형태의 혁명들에 종종 휩쓸려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는 가히 장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혁명의 실패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예수의 혁명은 진정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무상성10)의 혁명이다.
예수님에게 완전히 반하여 그의 혁명을 시도했던 몇 안되는 사람들은 -이냐시오도 그들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해서 우리 각자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이해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며 ... 마침내 사랑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3.3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거대한 산 제단.


  이 세상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는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의 "급진성"의 정도에 비례한다.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이라는 강줄기의 끝을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 (즉,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한 관상) 하여 세상의 바다에 닿도록 열어 놓고 "모든 것 안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우리 생의 지평으로 제시한 것은 완전히 혁명적인 구상이다. 그것은 역사상의 예외적인 위대한 증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백하게 고백하든 그렇지 않든- 제외하고는 가히 최초의 일이라고 하겠다.


  영신수련은 직접 어떤 사물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 사물을 바꾸어야 할 인간을 바꾸고자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바꾸고자 한다. 안목을 정화시킴으로써 그가 세상 앞에 새롭게, 곧 예전과 달리 행동할 용의를 갖고 서게끔 한다. 자신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자기 안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하여 구원을 지향하며 세상에 투신하는 것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 9). 예수의 생애와 나 자신의 개인사 체험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제 2, 3, 4주간의 관상의 여정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수행자의 안목을 정화시키면서, 하느님처럼, 항상 변함없고 의롭고 상대를 존중하며 정겹고 참을성 많으며 솔선하여 봉사하는 사랑을 지니고 세상에 나서게 한다.


  수행자의 정화된 눈에는 온 세상, 구체적으로 인간 역사가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사도 17, 23) 바치는 거대한 산 제단으로 비친다. 이제 그 자신이 그분에 대한 소식이 되어 기쁜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된다.


4. 넷째 열쇠: 영신수련 -봉사자 학교.


4.1 "열쇠는 봉사다."


  영신수련은 생활 개선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생활은 오직 봉사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지향할 때에만 개선될 수가 있다. 이냐시오 역시 온전한 의미의 영신수련이란 남을 "돕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수단이라고 이해하였다.


  영신수련을 개인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도구로 여긴다면 이는 영신수련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물론 영신수련의 목적이 공포감을 부추기는데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제거하려고만 하지도 않는다.
  영신수련의 목적은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을 키우고 사실상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데 있다. 영신수련은 목숨을 "잃는" 훈련이며 (요한 12, 25) 목숨을 잃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숨을 잃을만한 "이유"를 가르친다.
  영신수련은 단지 체험들을 내면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증거자들을 동원시키는 도구이다. 영신수련이 의도하는 것은 수행자를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18, 15)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깊숙한 곳에 머무는 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인간이 자기 완성의 지평인 봉사(섬김)의 지평에 서있는 존재라는 통찰에서 시작하여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봉사하기 위함이다." [23]) 봉사란 오직 그것이 사랑일 때에만 즉 대가없이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것일 때에만 진정한 것임을 발견하는 것으로 마친다.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즉, 당신의 사랑과 봉사의 능력을 주소서.- 이것으로 저는 족하옵니다." [234]


4.2 "사람답게 되도록 사람들을 돕는다."


  이 점에서도 아니 특히 이점에서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걸어온 생애를 반영한다.
  영신수련을 작성케한 그 체험의 첫 순간부터 그에게는 "거룩한 봉사"라는 구상이 절대 명제로서 동터오르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영혼들을 돕는" 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늘날 "사람답게 되도록 사람들을 돕는다"는 말과 의미하는 바가 같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형제들에게 봉사(섬김)하는 것은 두가지의 봉사가 아니다.
  두 번째 것은 첫 번째 것이 넘쳐 흘러서 되거나 나란히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을 방해하는 법이 없다. 이냐시오는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산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들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사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이 실현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기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혹은 이 두가지 때문에 왜소해진 사람들의 인간 실현을 위해 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섬기시는 하느님"의 (하느님에 대한 마지막 관상인 영신수련 [230-237]의 내용.) 자녀인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섬김"(봉사)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새 가족의 특징11)인 무상성과 동의어임을 이해할 수가 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인 섬김은 무상으로 받은 사랑을 무상으로 베풀게끔 하는 것이다.
  이 무상성을 사는 사람은 자기 몫으로 떼어놓는 일이 없고 베푸는 대가로 무엇을 청하거나 기다리거나 구하지 않는다.
  봉사를 하되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리고 가능한한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분한다.
  그래서 이 세상, 이 사회, 이 집단 등에서 가장 차별 받고 가장 낮아진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지 않게" (마태 18, 14) 하는 것이다.


4.3 보통 사람들: 이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돕는 일.


  영신수련은 그 수행자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에로 다시금 돌려 보낸다.
  교회는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섬김을 받거나 남들에게 섬김을 요구함으로써 이런 저런 형태로 스스로 파괴되는 존재이므로, 바로 섬기는 이들의 공동체이며 그 자체가 섬기는 존재이다.

  "전투교회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진정한 감각을 위한 규칙"은 [352-370]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모든 필요한 적응을 하여야 할 것이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분명하고 중요한 논지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오직 예수의 사명을 역사 속에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이는 구체적인 "인간의 길을 걸으며" 인간들과 함께 하며 봉사할 때, 그리고 그 일을 이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이냐시오의 표현으로는 "보통 사람들12)") 위한 각별한 감수성을 가지고 할 때 이루어진다.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일차적 대상으로 여기시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 현존케 함으로써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도우려는 과정에서 교회 안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갈등 상황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 아픔 속에서 이루어내는 일치의 생생한 증거야말로 참된 주님의 교회의 표지다. 바로 이 교회야말로 "오기로 되어 있으며" 지금도 오고 있고 이루어져가고 있는 교회이며 "다른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마태 11, 3 참조) 교회로서 이 한 몸 다 바쳐서 개선하고 쇄신할 가치가 있는 교회다.

이그나씨오 이글레시아 신부13) (P. Ignacio Iglesia,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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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냐시오 자서전 99. "영신수련은 단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영혼을 살피면서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 적어두었다고 하였다."
2) 영신수련 [5]
3) 영신수련 [15]
4) 1536년 11월 16일 포르투갈인 사제였던 마누엘 미오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였다. "두번 세 번,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다면 몇번이라도 더 거듭해서 ...(영신수련을 하시도록)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영적인 진보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돕고 진보하게 하는데 이 생애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왜 당신에게 힘껏 권면하지 않았느냐고 임종 때에 천주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5) 루가 10,21.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6) 영신수련 [23]
7) 칼 라너가 쓴 "현대 예수회원에게 들려주는 이냐시오의 말" 중의 한 구절이다.
8) 히브리서 1, 2. 
9) 영신수련 [104]
10) gratuidad. 無償性. 대가 없이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것을 말한다. 영신수련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11) 사도 2, 44-45.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12) 영신수련 [362, 367]  
13) 스페인의 관구장, 아루뻬 총장 보좌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이냐시오 영성전문지인 만레사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영신수련 지도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