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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의 유럽은 정치 적,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했고 교회 역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시기에 있었다.

  당시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로 알려졌던 이냐시오는 스페인의 명문 귀족 바스크 가문에서 태어난 13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26살 때까 지 그는 세속적인 허영에 몰두했고, 또 허무한 열망을 가지고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당시 나바르라 태수인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1521년에 프랑 스 군대가 스페인 국경선을 넘어 빰쁠로나로 침입해 들어 오자, 그는 성(城)을 사수하기 위하여 공격해 오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용감함에 탄복한 프랑스 군인들은 이냐시오를 자신의 고향 로욜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냐시오의 고통스러운 상처가 차츰 회복되면서, 그는 평소에 즐겨 읽던 무협소설 대신에 당시에 많이 읽혀지던 두 권의 영성 서적, 곧 '성인열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헛된 명예와 영달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 불타 올라 그분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성실한 봉사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로욜라 성을 떠난다. 그 후 몽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중, 1522년 3월 24일 밤중에, 그는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자신의 검과 단도는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했다.

  그 사건 이후 이냐시오는 몽세라트를 떠나 만레사에서 머물면서, 까르도넬 강가가 굽어보이는 동굴 안에서 기도와 극기로 1523년 2월까지 1년간의 세월을 보낸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 걸식을 하며 가시돋힌 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체험해 갔다. 그는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매우 우울하게 수 개월을 보내기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때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암흑의 밤이 지나간 뒤에 그가 체험한 것은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체험한 이냐시오는 그가 말한데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도적 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작은 도시 만레사를 떠나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의 사도직의 본질적 요소로 삼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는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 33살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운 후, 알칼라 대학에서 힘든 과목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공부기간 동안에도 그는 만레사에서 체험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데 헌신했다. 또한 1526년 대림시기부터 1527년 6월까지 키메네스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이를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6월 그는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거기서 이냐시오는 아주 열렬한 복음주의자 였던 까닭에 종교 심문관은 그의 생활방법과 설교, 신학을 문제삼아, 여러번 그를 투옥하고 심문하였다. 살라망카에서도 그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금지되어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1528년 2월 파리로 갔다. 그가 42세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533년 3월 13일 문학 강의 자격에 합격한다.
  그 당시 그는 파브로, 하비에르, 살메론, 라이네스, 보바딜랴, 로드리게스, 재이, 브로잇, 코르르들과 친분을 갖게 되어 그들을 영신수련을 통해 지도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이며,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고, 우리가 세상의 사도로서 살아가도록 길러준다. 이러한 기도와 사도직의 지침서인 '영신수련'으로부터,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예수회의 사도직이 등장하는 것이다.


  1534년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가난, 정결의 첫 허원을 했다. 1535년 4월 그는 대학공부를 끝내고 파리를 떠나 1537년 46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1537년 그가 파브로와 라이네즈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환시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단체를 '예수의 동반자' (Compainions of Jesus)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539년 3월, 이냐시오와 그의 동반자들은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예수회 첫 회헌을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0년 9월 27일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냐시오가 돌아가실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파견되었다.